연태 고량주

친구가 술을 사주었다. 메멘토 모리.와 카르페 디엠.을 대화의 주제로 삼았다. 깐풍기와 두부요리와 짬뽕을 안주로 먹었다. 큰 술병과 작은 술병. 두 개의 술병을 비웠다. 밤 아홉 시가 되니 중국집이 문을 닫는다 하였다. 720-2를 타고 오리역에 내려 천변을 걸어 귀가하였다. 밤은 어두웠고, 하늘은 맑았으며, 하늘은 청량하였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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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떤 글쓰기

“공부를 중단한 이래, 나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워 물지 않으면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. 닐리는 불빛 아래 담배 연기로 가득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. 그러면 나는 비행기 세면소만 한 비좁은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변기 뚜껑에 앉아 , 결혼 선물로 받은 고흐 전집 한 권을 무릅에 올려 놓고, 다시 노트를 그 위에 올려 놓고는, 담배를 한 대를 피워 물고, 한나가 내게 불러주는 대로, 피로와 슬픔으로 내 눈이 감기는 자정이나 새벽 1시까지 글을 썼다.” –amos oz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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프로젝트 오일러

“프로젝트 오일러”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. 수학 및 컴퓨터 프로그래밍 문제가 잔뜩 있다. 파이썬 책에 나와 있어 알게 되었고, 바로 회원 가입했다. 허영심이다. 책이 출간될 때는 529개의 문제가 있었나 보다. 지금 보니 713개의 문제가 출제되어 있다. https://projecteuler.net 문제가 많은 사이트이다. 나는 이 많은 문제를 다 풀기는커녕 문제를 다 읽어보지도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. 아마. 프로젝트 오일러의 첫 문제. 소설의 첫 문장. 첫 사랑. 첫 눈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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묘비명 시인

가령 나는 분당 메모리얼 파크 입구에 자리 깔고 앉아 갓 죽은 신선한 죽음들에게 묘비명을 써주는 시인이고 싶은 것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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자식도 다른 나라다

과거는 낯선 나라다, 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. 절판되었고 중고책 가격이 상당하다. 과거가 낯선 나라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자식이 낯선 나라라는 거는 분명하다. 이 사실이 사실이고, 이 팩트가 팩트이며, 이 진실이 진실이다. 자식과는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지내는 게 제일 좋은 거 같다. 부모 자식 간의 피는 가까운지 몰라도 부모와 자식의 마음은 별개인 것이다. 우리는 그냥 각자 고독한 개체인 것이다. 가족도 남인 것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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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이시옷의 침공

사이시옷이 쳐들어 온다. 하다하다 이제는 초깃값, 결괏값 등에도 사이시옷을 써야하는 건가 보다. 방금 어떤 책에서 봤는데 하, 뭔가 초현실적이다. 어떤 사람은 습니다, 를 여전히 읍니다, 로 표기한다. 그 사람에게 읍니다, 를 습니다, 로 써야 한다고 말하면 싫다고 자기는 그냥 읍니다, 로 쓰다 죽겠다고 대꾸할 수도 있다. 이해한다. 누가 나에게 초기값, 결과값, 이 아니라 초깃값, 결괏값, 으로 써야 한다고 말한다면 알았다고 대답하고 그냥 초기값, 결과값, 이라고 표기할 것이다. 사이시옷이 아무리 쳐들어 와도 나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. 결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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장마와 점심

몹시 귀찮았으나 냉면을 제작해 대학생 딸을 먹이고 나도 먹었다. 딸은 남동생이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. 딸은 또 남동생의 군대 문제에 대해 물었다. 초벌 설거지 해놓고 책상에 앉아 커피 마신다. 장마다. 본격적인 장마. 코니가 산지기의 오두막을 찾아가 밤을 함께 보내는 장면을 읽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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능소화

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오다가 꽃을 보았다. 많이 본 꽃이다. 벌써 저 꽃이 피는가. 저 꽃이 피면 때는 본격적으로 여름이다. 참 이상한 해의 절반을 지나가며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오다다 꽃을, 본격적인 여름의 꽃을 보았다. 저 꽃. 이름이 뭐더라. 이름이 뭐였더라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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결정의 본질, 인용

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가 기자회견을 열어 동독 주민이 서독을 방문할 때 필요한 절차를 바꾼다고 발표했다. 새로운 절차는 표현이 애매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, 그날 밤 동독 주민 수만 명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가 서독으로 넘어가려고 시도했다. 국경경비대는 정부 선언의 내용, 심지어 그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. 수만 명이 몰려든 사태나, 쏟아지는 질문에 대처할 표준운영절차가 없었다. 무방비 상태에서 경비대는 군중에 발포하거나 길을 열어주는 수밖에 없었다. 경비대는 길을 열어주는 방법을 택했고, 그래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. 203p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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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양이에게 코로나를 묻다

지나가는 고양이에게 코로나를 물었다. 고양이는 야옹, 하더니 별 미친 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제 갈 길 갔다. 지나가는 고양이는 사실 우리집에 사는 고양이이다. 우리집에 사는 고양이는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. 그래서 맨날 지나간다. 덩달아 나도 그냥 지나간다. 우리집 고양이는 나에게는 지나가는 고양이인데 가끔은 제 앞을 지나가는 나를 톡톡 치기도 한다. 돌아보면 저 만치 내빼고 없다. 지나가는 고양이와 지나가는 인간의 관계는 딱히 좋지도 아니하고 나쁘지도 아니하다. 지나가는 고양이는 막내가 화장실에 들어가 앉으면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. 막내에게 고양이는 지나가는 고양이가 아니라 앉아 있는 고양이, 보채는 고양이이다.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코로나를 물었으나 지나가는 고양이는 코로나를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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